사도행전 9:1-2
많은 분들이 바울의 이름이 큰 자라는 뜻의 사울이었다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작은 자라는 의미의 바울로 바꾸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참으로 은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는 것을 보면서 바울도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두 개의 이름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히브리식 이름인 ‘구하다 요청하다’는 의미를 가진 ‘사울’과, 또다른 하나는 그리스식 이름인 ‘작다’는 의미를 가진 바울입니다.
사울은 교회를 위협하려고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의 모습은 마치 추노꾼(조선시대에 도망간 노비를 쫓는 사람)과 같았습니다. 어디라도 쫓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예루살렘 성전의 공회로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집요하고 무자비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진멸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움직여야 무언가 일을 완성할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을 ‘자기 의’라고 합니다. 사울은 ‘자기 의’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승리합니다(왕상 18장). 그런데 이세벨의 협박 속에 도망자가 되어, 하나님께 죽는 게 낫겠다고 하소연을 하는 신세가 됩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다 죽이면 이 가뭄과 고통의 시절이 다 끝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상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세벨이 시퍼렇게 살아있었고,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운행하시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자기 의’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의 주제입니다. 이 사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인 교회인데, 그 주체가 “성령 중심으로 사는” 성도, 교회입니다. 광야의 교회에서는 40년 동안 하나님 중심의 삶이 무엇인지 배웠다면, 사도행전의 교회에서는 성령 중심의 삶이 무엇인지를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울입니다. ‘자기 의’로 살던 사람이 성령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여러분, 중심을 잃은 열심은 자기 의가 되고 맙니다. 자기 의, 자기 중심의 신앙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과 동행하는 삶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아침, 나의 주권을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나는 주님의 종이요, 청지기라는 고백을 하며 하루를 시작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의 고백과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악한 것으로 부터 우리를 지키시며,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